3. 고조선의 중심지와 강역
1) 고조선의 중심지
(1) 중심지에 대한 여러 견해
고조선의 중심지문제는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지명 주석에서부터 조선전기의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에서도 언급되었으며 조선후기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어왔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이후 오늘날 까지도 고조선의 중심지를 요령성 일대에 비정하는 요령설과 평양일대에 비정하는 평양설, 그리고 요령일대에서 평양으로 중심지가 옮겨졌다는 이동설 등으로 입장이 나뉘어져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고조선 중심지에 대한 사학사적인 흐름을 보면 과거 몽골족이나 만주족 등 북방족의 침략을 받아 문화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때에는 고조선의 평양 중심설이 나온다. 요동 중심설은 북방고토에 대한 수복의지가 있거나, 우리역사 무대를 한반도로 축소하려는 중국이나 일본사학계의 왜곡이 있을 때 강력하게 등장하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 요동 중심설
요동 중심설은 조선초 권람이 지은 《응제시주》에서 낙랑을 압록강 북쪽에 있고 기자의 건국지를 청주(요서,요동)로 비정하여 고조선의 중심지를 요동으로 파악하였다. 이후 홍여하는 《동국통감제강》에서 진번을 요양에 비정하고 패수도 요하로 비정하여 고조선의 요동설을 주장하였고, 신경준과 이익 등도 고조선의 중심을 요동지역을 비정하였다.16 이후 요동 중심설은 일제강점기 신채호 · 최남선 · 정인보로 이어졌다. 해방이후 북한학계의 리지린은 대릉하를 고조선의 국경선인 패수로 보고 어니하를 왕검성의 패수라고 비정하여 고조선의 중심지를 오늘날의 개평으로 보고 있다. 기원전 7세기 이전에는 개국 · 청구국 · 숙신국 등의 국명이 있었으나 기원전 7세기 이후에는 조선만 보이는데 이는 여러 나라를 통일한 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난하 좌안지대인 창여에 고조선의 도읍지가 언제인가 있었다고 보았다.17 남한학계에서는 윤내현이 중국 사서를 중점적으로 검토하여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였지 지금의 요하가 아니었으며, 당시의 요동은 지금의 난하의 동북쪽지역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동은 고조선 · 위만조선의 영토였으므로 난하의 동쪽지역이 고조선의 영토였다는 견해이다. 또한 고조선의 도읍지는 만주지역인 본계, 창려, 북진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18
- 평양 중심설
고조선이 평양지역에 위치하였다고 처음 기록한 사람은 《수경》에 주석을 단 《수경주》의 저자 역도원이다. 역도원은 북위시대 사람으로 북위에 온 고구려 사신에게 낙랑의 위치가 평양성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는19 기록을 남겨 이후 고조선 평양 중심설의 중요한 논거로 작용했다. 승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고조선 관련 지명에 대한 주석에서 단군이 도읍한 평양성을 당시의 서경으로 비정하였다. 이후 조선중기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에서 고조선과 삼한이 한강을 경계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체계를 세워 이후 고조선의 강역이 압록강 이남지역 즉 한반도에 국한되어20 있었다는 견해가 일반화되었다고 본다. 고조선의 평양 중심설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체계화 되었다. 1930년대 집중적으로 발굴된 평양일대의 중국계 유물과 유적을 결정적 증거로 활용하여 식민지배의 역사적 설명도구로 활용하기도 하였다.21 이병도 등 다수의 학자들은 아사달을 현재의 평양으로 보고 《사기》의 패수를 청천강으로, 《위략》의 만번한을 박천강 일대로, 《한서》의 열수를 대동강으로 보아 고조선의 강역을 지금의 평안남도지역으로 비정하였다.22
- 중심지 이동설
초기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지역이었으나 후기에는 연 세력의 확장에 따라 그 중심지를 한반도 평양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견해이다. 이 설은 해방이후 남한학계에서 주로 제기한 학설로 중국의 문헌과 고고학적인 성과를 반영한 견해로 오늘날 다수설로 볼 수 있다. 노태돈은 중심지 이동설 관점에서 고조선의 변천을 연의 세력이 주초인 기원전 11세기경 대릉하 중 · 상류 유역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고, 기원전 8세기경 비파형동검문화가 발달하면서 남쪽으로 밀려난 것으로 본다. 기원전 7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요서지방에는 산융의 여러 집단이 활동하였고 이들과 비파형동검 문화가 연결된다. 기원전 3세기에는 요서지방은 동호의 지역이었고 요하이동이 고조선지역이므로, 기원전 3세기 초까지 고조선의 중심부는 요동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연의 기습공격을 받은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이동하게 되었으며 만번한이 고조선의 중심지였거나 동쪽외곽이었고,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는 해성현의 서남쪽과 개평현을 포괄하는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23
천관우는 기자동래설의 관점에서 기자가 은나라 사람이지만 동래한 후에 기자 족은 한국인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 중 일부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기자는 개인보다 집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기자족의 일파는 난하 하류의 고죽국 근처에 한동안 정착하였는데 바로 이 기자가 머문 지역이 조선이며, 조선왕의 구도를 뜻하는 왕험 · 험독도 요서 · 요동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자 족은 고죽국을 떠나 요서 · 요동으로 이동하면서도 계속 조선이라고 불렸으며, 기자 족은 기자의 사후에도 기자 족단이라는 혈연의식을 가지고 은말 주초로부터 여러 세기가 지난 뒤에 평양지역에 도달한 것으로 보고 있다.24
김정학은 요령지방 청동기문화는 조양 · 요동반도 · 요동지방에 각각 읍락국가의 정치 · 문화적 중심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고조선을 맹주 국으로 하는 연맹국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의 침략으로 고조선의 세력이 약해져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기원전 4~3세기경에는 고조선의 영역이 요동에서 한반도의 서북부에 걸쳐있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25
서영수는 고조선은 초기 중심지가 요동지역이나 후기에는 대동강 유역의 평양지역으로 이동했고 전성기의 고조선의 강역은 대체로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대릉하 유역에서 동호와 접하였고 남쪽으로는 대동강 유역을 경계로 진국과 이웃하였으며 북쪽과 동쪽으로는 예맥 · 부여 · 진번 · 임둔 · 숙신과 접하였다. 우리민족 최초국가인 고조선의 위치는 요동의 험독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라고 보고 대체로 요하 이동 천산 이서의 어느 지역일 것으로 추정하였다.26
앞에서 고조선의 중심지는 어느 곳인지 다양한 견해를 살펴보았다. <요동설>은 조선초 권람의 《응제시주》에서 기자의 건국지를 청주(요서·요동)로 비정하였고, 홍여하는 《동국통감제강》에서 패수를 요하로 비정하였다. 신경준과 이익 등 실학자들은 고조선의 중심지를 요동지역으로 비정하였고, 일제강점기 신채호 · 최남선 · 정인보로 이어졌다. 해방이후 북한학계 리지린은 대릉하를 고조선의 국경선인 패수로 보고 고조선의 중심지를 오늘날의 개평으로 보았다. 윤내현은 중국사서에 근거해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였고 당시의 요동은 난하의 동북쪽을 지칭하였기에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영토는 난하 동쪽이고 고조선의 도읍지는 본계, 창려, 북진지역으로 파악하였다.
<평양중심설>은 북위 때 사람 역도원이 고구려 사신에게 낙랑의 위치가 평양성이라는 것을 확인한 기록을 바탕으로 주장된 설이다. 《삼국유사》에서 지명에 대한 주석에 단군이 도읍한 평양성은 당시 서경으로 비정하였다.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은 평양일대에서 발굴된 중국계 유물을 근거로 하여 평양설을 주장한 바 있고, 이병도는 아사달을 평양으로 패수를 청천강으로 열수를 대동강으로 보고 고조선 강역을 평안남도 지역으로 비정했다.
<중심지 이동설>은 초기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지역이었으나 후기에는 중심지가 평양으로 이동했다는 내용이다. 노태돈은 기원전 3세기 초까지는 고조선 중심지가 요동이었으나 연의 공격으로 그 중심지가 이동했다는 것이다. 천관우는 기자동래설의 관점에서 난하 하류의 고죽국에서 기자가 한동안 머물렀던 지역이 고조선이고 이후 요서와 요동으로 이동하면서 조선이라 불렸고, 기자 사후에도 기자 족단 이라는 혈연의식을 가지고 평양에 도달한 것으로 보았다. 김정학은 요령 청동기문화는 조양 · 요동반도 · 요동지방에 각각 읍락국가의 정치문화의 중심이었는데 고조선을 맹주 국으로 하는 연맹국가를 이루었다. 연의 침략으로 고조선은 동쪽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기원전 4~3세기경의 고조선 영역은 요동에서 한반도에 걸쳐있게 되었다. 서영수는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지역이나 후기에는 대동강 평양지역으로 이동했고 전성기 고조선 강역은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대릉하 유역, 남쪽은 대동강유역 북쪽과 동쪽은 부여 · 숙신 등과 접하는 것으로 보았고 초기 중심지는 요동의 험독 부근으로 보는 등 다양한 견해들이 주장되고 있다.
필자의 견해는 요동설은 조선초 권람이 기자의 건국지를 비정하면서 시작되었고 이후 실학자나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주장하였다. 해방이후 리지린과 윤내현이 동조하고 있지만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지역에만 있었다는 내용은 평양의 고고학적, 역사학적 위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논리에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본다.
평양설은 북위시대 역도원이 고구려 사신에게 낙랑의 위치를 직접 물어보고 판단했다는 내용은 상당한 근거가 될 만한 내용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고구려 당시의 정세나 역사 그리고 지명에 관한 내용이라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도원이 400여 년 전에 설치된 낙랑의 위치를 자료가 아닌 구전으로만 전해온 내용을 갖고 단정 짓는다는 것은 입증에 신뢰성이 부족하다고 하겠다. 중심지이동설에서 김정학의 조양 · 요동반도 · 요동지역에 각각의 읍락국가가 정치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고, 고조선을 맹주국으로 하는 연맹국가를 이루었으나 연 침략으로 기원전 4~3세기경 고조선의 중심이 요동에서 한반도 서북부로 이동했다는 견해와 서영수의 초기 중심지는 요동이었으나 후기에는 평양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이 문헌사료나 고고학 자료를 참고해 볼 때 가장 타당하고 합리적인 논리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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