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고조선 중심지에 관한 북한학계의 견해
고조선의 역사와 문화가 자리한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연구해온 북한학계의 고조선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단군조선은 기원전 30세기 초에 성립하여 1,500여 년간 존속한 우리나라의 첫 고대국가이다. 이 나라는 조선에서 뿐 아니라 동방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고대국가이기도 하다. 대동강유역은 태고 옛적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원시사회 때부터 경제와 문화가 일찍 발전된 곳이다. 평양 검은모루 유적에서 100만 년 전 원인단계의 인류가 남긴 유적이 발견되었고 고인의 화석인 ‘화대사람’, ‘력포사람’, ‘덕천사람’, 신인의 화석인 ‘승리산사람’, ‘만달사람’, ‘룡곡사람’, ‘풍곡사람’ 등이 나왔다. 현대 조선 사람의 직접선조인 조선 옛 유형의 사람들이 남긴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도 많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대동강 유역이 예로부터 사람들이 련면하게 살면서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기에 적당한 고장이었음을 보여준다. 대동강 유역에는 덕천시 남양 유적, 평양 호남리 표대 유적, 남경 유적, 금탄리 유적, 봉산군 마산리 유적, 지탑리 유적을 비롯하여 신석기와 청동기시대 고대의 대규모 부락 터들이 분포되어있다.
- 단군조선의 건국
첫 고대국가 고조선은 기원전 30세기 초에 평양 지방을 중심으로 단군에 의하여 세워졌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의 첫머리 고조선 항목에서 《위서》와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조선의 형성에 대하여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단군이 다름 아닌 평양 부근에서 천신족과 곰 토템족의 혼인관계에 의하여 출생하였다는 것은 단군릉이 강동에 있다는 사실과 결부시켜 볼 수 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태백산이 강동지방에 있으며, 단군관계 설화가 깃든 단군굴, 단군못, 단군동 들이 강동지방에 산재되어 있다. 단군릉에서 발굴한 단군유골의 ESR(전자상자성공명법)수치가 5,011±267년 조건에서 5011년 전경에 태어났고, 기원전 30세기 초 그가 20여 살이 되었을 때 건국했다고 볼 수 있다. 단군조선의 성립 년대 문제는 전조선(단군조선), 후조선, 만조선의 3조선의 존속기간을 옳게 해석해야 한다. 만조선은 기원전 194~108년까지인데 단군조선의 성립시기인 기원전 30세기부터이면 약 2,800년간이 전 · 후조선의 존속기간이 된다.
단군조선이 기원전 30세기 초 형성되었다고 보는 고고학적 증거는 단군유골의 계측 년대가 5,011±267년이었다는 것이고, 평양과 그 주변 100리 이내 지방에 1만4,000여기의 고인돌 무덤들이 분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청동제 무기인 비파형단검과 비파형창끝, 청동2인 교예 장식품 등이 기원전 3,000년 기 초 중엽에 생산제작 되었던 것으로 입증할 수 있다. 단군조선은 건국시조의 무덤에서 유해가 나왔으며, 국호가 ‘조선’이었고 수도가 처음부터 평양에 있었으며, 고대국가의 존속과 그 문화 발전상을 보여주는 노예순장무덤, 고대 성곽들과 청동무기를 비롯한 청동제품 등이 단군조선의 역사가 오래되고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밟아왔다는 논지를 펴고 있다.27 이러한 북한학계의 논지는 평양지역에 단군유적이 집중되어 일면 타당성이 있다고 볼 수도 있으나 고조선강역의 전체적인 흐름보다는 대동강 유역의 평양 지역에만 초점을 맞추어 강조한 것으로 종합적인 연구가 뒷받침 되어야할 것으로 보인다.
2) 고조선의 강역 변동
고조선의 강역은 그 시기에 따라 확대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하면서 변천의 길을 걸었다. 단군조선의 초기 강역은 평양을 중심으로 대동강 이북에서 요서와 요동일대로 볼 수 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조선 일대 특히 강동과 성천, 묘향산과 구월산 일대에 단군과 관련된 전설과 지명이 많을 뿐만 아니라 단군조선 초기의 대표적 유물의 하나인 팽이그릇, 조롱박형단지 등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고조선의 강역은 단군조선과 후조선의 교체기에 후국들의 분립과 관련하여 북쪽과 동쪽, 남쪽에서 많이 줄어들었다고 인정된다. 그리하여 고조선은 후조선시기에 대체로 철령일대(요녕성), 평안북도와 자강도 접경지대, 함경남도 일대를 계선으로 하여 부여 · 구려와 접하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멸악산맥일대와 강원도 중부일대를 계선으로 하여 진국과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조선은 후조선 초기에 서쪽으로 세력을 뻗쳐 오늘날의 란하 중류 일대까지 그 강역을 넓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후조선 초기의 서변에 대해 전하는 문헌기록은 없다.28
중국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요서지구 서쪽의 하가점 상층문화와 요서지구 동부의 위영자문화의 질그릇들은 그 원형을 고태산문화에서 찾을 수 있고 고태산문화는 순산둔문화로 이어질 뿐 아니라 요동지방의 문화와도 공통성을 띠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위영자문화는 대릉하 유역에서 창조된 문화로서 란하 이동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이 위영자문화의 출현은 고태산문화의 ‘서쪽에로의 진출’의 결과였다고 한다. 이 문화의 연대는 대체로 은허시기에 해당하며 그 창조자는 《사기》 <오제본기> 등에 보이는 ‘발인’ 즉 고대 조선 주민들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29
후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2천년 기 후반기경에 고조선 사람들이 요서지구에 대대적으로 진출하였고, 이 시기에 고조선의 서변이 란하 계선까지 확대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후의 요수(BC.1세기 이전의 란하)관계의 문헌자료들에 근거해보면 고조선은 대체로 기원전 4세기경까지 란하 계선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기원전 3세기 초 연나라 진개의 침공으로 고조선은 서쪽 ‘2,000여리’를 잃고 한때 료하 서쪽 요양일대까지 물러섰으나 다시 서쪽으로 얼마간 진출하여 지금의 대릉하(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문헌에 나타난 고조선 강역
앞에서 살펴본 고조선의 중심지에 이어서 문헌에 나타난 고조선 강역을 살펴보자. 첫 번째로 중국 문헌에 등장하고 있는 고조선의 서쪽경계를 파악해보면 주나라 성립 이후인 B.C.12세기경에도 이족들이 주나라의 서남쪽으로 자주 침공해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자 서주시기에 주는 소공석을 연에 봉하고 당숙을 진에 봉하여 이족들의 침공을 막게 하였다. 연나라는 당시 황하 이남의 소국이었으며 지금의 북경일대는 연나라 땅이 아니라 동이족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북경지역이 연나라 땅이 된 것은 기원전 4세기경인 연 소왕(기원전 311~270)때 국력을 키워 북천한 때부터인 것으로 보인다.30
《사기》 권115 <흉노>전에 “연은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으로부터 양평에 이르렀다. 그리고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을 설치하여 동호에 대항했다.”라고 하여 연이 장성을 쌓고 5군을 설치 동호에 대항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진나라 때까지 요하는 지금의 난하라고 신채호 선생은 보았다.31 어환의 《위략》에 “연은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지방을 침공하고 2천 여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고 하여 만번한이 조선과의 경계임을 나타내고 있고 기원전 3세기경까지는 고조선의 영역이 요하선 까지 유지되다가 요동지역 거점을 상실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기》 권115 <조선열전>에
“연나라가 전성한 때부터 일찍이 진번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기위해 장새를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염철론》 권7 비호편에
“대부 왈 옛날에 사이가 모두 강하여 침략해 들어와, 조선은 교를 넘어 연의 동쪽 땅을 빼앗았다.”라고 기록되어 연의 진개가 한때 진번조선의 땅 1천 여리를 빼앗아 장새를 세웠으나, 이후 진번조선이 반격을 가하여 교를 넘어서 연의 동쪽 땅을 수복해 갔음을 설명하고 있다. 연나라와 진나라 시기까지는 요서 · 요동의 경계를 이룬 요수는 지금의 난하를 가르치는 명칭으로 볼 수 있다. 중국 고대에 요하 · 요수는 중국의 동북지방에 있는 강의 호칭으로 여러 차례 변동되어 불려 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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