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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록

[한민족과 고조선 한]_7장

by 늘별~* 2023.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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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은 어떤 나라인가

1) 한의 국 성립

한의 국들은 모두 청동기문화 단계 이후 초기에는 대동강을 경계로 이남지역에 후기에는 멸악산맥주변을 경계로 이남지역에 자리 잡았던 토착사회가 성장 발전하여 형성된 것으로 본다. 한은 후한서<동이열전> 한전에 마한 54, 진한 12, 변한 12국 등 78개국으로 구성되어있다. 진왕은 한의 전 지역을 다스렸다고 하였으므로 마한, 진한, 변한의 모든 나라는 한()에 속하고 진왕의 통치를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나 은 고대어에서 크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진왕은 삼한을 통치하는 큰 왕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 진왕의 지배를 받은 한의 78국 지배자를 거수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있다.

후한서<동이열전> 한전에

여러 작은 별 읍에는 각각 거수가 있는데, 강대한자를 신지라 불렀고 다음에는 검측이 있으며 다음에는 번지가 있고 다음에는 살해가 있으며 다음에는 읍차가 있다.”

삼국지<동이전> 한전에

“(국마다)장사가 있는데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고 했다.····· 변진도 12국인데 여러 작은 별 읍에도 각각 거수가 있다. 그 가운데 세력이 큰 사람을 신지라하고 그 다음에 험측이 있으며 다음에는 번예가 있고 다음에는 살해가 있으며 다음에는 읍차가 있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한의 거수들은 국의 규모에 따라 신지 · 험측(검측) · 번예(번지) · 살예 · 읍차 등의 다양한 호칭이 있었다.

한에 속해 있었던 각국의 거수들은 진왕에 대해 일정한 의무들과 공납의 의무를 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조에

“382월 호공을 마한에 보내서 수빙 했는데 마한 왕이 호공을 꾸짖어서 말하기를 진한 · 변한 두 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직공을 보내지 않으니 대국을 섬기는 예가 이 같을 수가 있느냐고 했다.”

라고 하여 마한왕은 진국을 대표하는 왕으로서 진한의 사신인 호공에게 속국인 진한과 변한이 직공을 납부하지 않은 것을 꾸짖어서 대국에 대한 예의를 제대로 갖추도록 요구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국의 규모에 대해서는 삼국지<동이전> 한전 마한조에

대국은 만 여가, 소국은 수 천가로 총 10여 만 호이다.”

변진조에는 대국 4~5천 가, 소국 6~7백 가로 총 4~5만 호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국의 규모가 마한의 큰 나라는 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 총 십만 여 호로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진변한은 큰 나라는 4~5천호, 작은 나라는 6~7백가로 마한에 비해 적은 규모의 호수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한의 국 규모와 성격

78국의 규모는 후한서삼국지에 기록된 대로 마한은 큰 나라가 만 여가 작은 나라가 수천가로 총 10여만 호이다. 변진한은 큰 나라가 4~5천 가 소국은 6~7백 가로 총 4~5만 호이다. 고대사회의 인구수는 일반적으로 1호에 5명으로 계산하는데 마한은 10여 만호에 50여 만 명이 된다. 마한의 큰 나라는 만여 호에 5만 여명의 인구를 포용한 상당히 거대한 규모의 사회를 이루었고 작은 나라는 대략 1만명 내외의 인구 규모로 파악할 수 있다.

진변한은 24국으로 총 4~5만 호에 인구는 20만 명~25만 명 정도의 인구수를 가지고 있다. 진변한은 마한에 비해 나라의 규모와 인구수가 작기는 하지만 큰 나라가 2~25천 명을 포용한 제법 큰 인구를 가지고 있고 작은 나라는 3~35백여 명 정도의 인구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한반도 서북한 지역에 위만조선이 성립되어있던 시기에 한반도 중남부에 존립했던 한의 7875만 여 명의 인구를 포용한 한국의 성격 규명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김정배는 마한이나 변진 각국의 호수가 평균 2천 호가 된다고 보고 호당 인구수를 5인으로 잡을 경우 인구는 1만 명으로 보았다. 국 읍에는 천군이 있었으며 국 읍은 국의 중심이 되는 곳을 뜻하며 국 읍에는 만 명 정도를 다스리는 통치자도 있다고 했다. 군장사회를 인구 1만 명~12천 명 선으로 파악하여 삼한제국이 군장사회의 단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25

이현혜는 삼국지에 기록된 삼한의 평균호수는 2~3천 호로서 사로국과 구야국은 오천 호정도의 대국에 속하는데 육촌과 구간으로 계산하면 평균 육백~팔백 호정도가 된다고 하였다. 그는 삼국지에 보이는 읍락들도 그 형성 초기 단계에는 오 육백호 미만의 규모를 가진 소집단으로서 그들의 지배자는 소량의 청동기를 가진 존재이며 한 소국의 읍락들은 대개 천 호 미만을 가진 정치집단으로 간주하였다.26

이병도는 삼한의 국을 하나의 부족국가로서 그 영역과 인구가 한 군현의 1현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하였다.27

김철준은 초기의 국가가 부족국가로 발전하였고 국가 발전 단계를 부족국가-부족연맹체국가-고대국가의 순으로 파악하였다.28

천관우는 부족국가란 개념 대신에 성읍국가론을 제기하였다. 성읍국가는 도시국가, 읍제국가 등의 개념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이는 씨족제, 성읍국가, 영역국가, 대제국이란 국가 발전과정의 도식을 전제로 하여 삼한의 국 수준을 성읍국가 수준으로 파악한 것이다.29

한의 국 규모는 마한의 큰 국은 만여호에 5만 여명의 인구를 포용한 큰 나라도 있지만 1국의 평균호수는 이삼천호이고 인구는 일만 여명 정도의 읍락국가들이 연계된 위만조선과 비교되는 초기형태의 국가로 볼 수 있다고 하겠다.

한의 국에는 여러 수준의 읍이 설치되어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삼국지<동이전> 한전에

“(마한에는) 각각 장수가 있어서 세력이 강 한자는 스스로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고 하였다.그리고 여러 한국의 신지에게는 읍 군의 인완을 더해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을 주었다.” 라고 하여 한국의 주거 집단은 크기와 조직에 따라 읍과 락으로 구성 읍락이라고 호칭한 것으로 보인다. 읍락을 세분하면 국 읍은 각국의 대읍으로서 신지가 있어서 다스린다. 소도 별읍은 천군이 관장하는 지역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특별지역이다. 소읍은 중소규모의 집단거주지로 소읍의 규모에 따라 지도자를 검측 또는 번지라고 칭했다. 읍은 소규모로 지도자를 살해라고 칭했다. 촌락은 읍에 소속된 마을로 촌장을 읍차로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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