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청동기시대 사람은 누구인가.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한민족의 기원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큰 관심을 받아왔다. 1960~70년대부터 관심을 받아 온 것은 구석기시대 말의 빙하기에 한반도가 인류의 공백지대로 남아 있다가, 간빙기가 도래하자 시베리아 바이칼 호 부근에서 온 고아시아족이 한반도로 이주하여 신석기시대 채집, 수렵, 어로 문화를 이루어갔다. 이후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알타이계의 예맥족이나 퉁구스족에 의해 교체되고 이 새로운 주민이 청동기시대의 농경문화를 영위해갔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구석기말 이후 한반도에서 주민교체가 두부 자르듯이 일어날 수는 없고, 남 · 북방계 몽골리안 계통인 고아시아족 · 예맥족 · 퉁구스족 · 한족 등이 거주 구역을 달리하는 가운데 이동과 교류를 통해서 청동기시대 혈연적 융합을 이루어나간 것으로 필자는 보고 있다.
1) 중앙아시아 양상
동북아시아 청동기시대의 시작은 멀리 메소포타미아 · 터키 에서 흑해 · 카스피해 등 초원의 길을 따라 알타이산맥이 위치한 중앙아시아와 남시베리아를 거쳐 몽골과 만주지방으로 연결된 북방 청동기문화가 형성전파 되어 진 것으로 본다. 북방 청동기시대 사람 두개 안면 연구에 따르면 알타이산맥 주변의 아파나세브 · 파지리크 · 부리야트 글라즈코브와 내몽골지역 두개골 두개 안면 분석은 동지역의 인종이 형태학적 특성에 있어서 상당한 이질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코카서스 인종과 혼합된 형태학적 특징을 갖고 있는 인종은 신장의 알타이 산에 거주했던 반면, 발달된 몽골인종 특성을 가진 인종은 부리야트와 내몽골 지역을 점유하였고 후기 청동기시대에서는 보다 뚜렷한 몽골인종의 형태학적 특징을 보여준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남부에서의 몽골인종과 코카서스 인종의 혼합은 청동기시대 초기의 시작과 함께 점차적으로 증가하고, 알타이산맥지역 청동기시대 인종에는 동몽골인종과 혼합이 있었다. 시베리아 남부와 알타이산맥 지역의 파지리크, 타가르, 카라수크 청동기문화는 몽골 및 내몽골의 청동기시대 문화와 일련의 관련이 있다. 청동기시대에 시베리아 남부, 몽골, 중국북부에 거주하던 사람들 간에 대규모 지역횡단 이주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3
2) 만주와 한반도 양상
청동기시대 사람의 형질적 특징에 관한 정보는 인골 자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에서 출토된 양질의 인골 자료는 빈약하다. 한반도에는 화강암이 풍화된 사립질의 산성토양이 분포하고 있어 인골이 잔존하기가 어렵다. 반면 중국 동북지방은 토양 양상이 달라 무덤을 발굴하면 인골이 확인될 수 있으나 지석묘와 적석묘를 중심으로 화장이 성행했기 때문에 좋은 상태의 인골을 찾기가 어렵다. 중국 동북지방에서 인골이 출토된 주요 유적은 내몽골자치구 지역의 적봉 홍산후 · 적봉 하가점 · 영성 남산근 · 영성 소흑석구 · 오한기 대전자 등이 있다. 요령성 지역에는 조양 십이대영자 · 객좌 남동구 · 여대 윤가촌 · 심양 정가와자 · 대련 강상누상 · 강평 순산둔 · 본계 묘후산 동굴 등이며, 길림성지역의 서단산 · 소달구 · 영길 소단산 등이다.
중국 동북지방의 주요 인골자료를 두개골형태 기준으로 분석하면 요서 · 요동 · 길림의 청동기시대 주민이 동아시아계 몽골인종과 북아시아계 몽골인종이 뒤섞인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인골 자료를 비교 분석한 내용은 한국 주민의 해부학적인 특징은 ‘높은머리’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4
한편 중국 동북지방 인골에 대해서 중국학계는 이 지역에 산융 ·동호 · 예맥 등 여러 민족이 섞여있었으므로 이 인골들도 동일한 민족에 속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북한학계에서는 이들이 현대 북중국인의 특징을 일부 보이기는 하지만 고두 · 눈 확의 크기 등 형질적인 자료와 비파형동검 · 석관묘 · 세문경 등의 유물이 여타 요동지방 문화와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고대 조선족의 일부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인골을 살펴보면 서포항패총 에서 성인남자 3개체분이 확인되었는데 두개골은 초단두형이며 신장은 151.3~163.4㎝이다. 무산범의 구역에서는 주거 유적에서 성인여자와 노년남자가 확인되었는데 두개골 · 안면골 · 사지골 일부가 잔존해있다. 제천 황석리 지석묘에서는 동침앙와장을 한 남자가 확인되었는데 신장 174㎝의 큰 키에 두개 형태는 장두 형으로 코카서스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중도 지석묘에서는 여성유아를 화장한 흔적과 앙와 굴절장 형태가 확인되었다. 송평동 패총에서는 4기중 3기는 단장,1기는 합장했는데 동서방향으로 신전앙와장 형태였다. 나진 초도패총에서는 14개체분이 발견되었는데 반굴신장으로 매장되었다.5
한반도 일부 유적지에서는 일반적인 경향과 다소 차이가 나는 인골이 출토되기도 한다. 특히 제천 황석리 지석묘 출토 인골은 신장이 크고 골격이 강건하며 두 개가 장두형인 중년남성으로 밝혀진 바 있다. 한국인의 일반적인 두개골은 ‘단두형’의 특징을 보이는데 비해 황석리 인골의 해부학적인 특징은 청동기시대 한반도에 코카서스 계통의 주민이 살았다는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 춘천 중도와 정선 아우라지 유적에서 나온 인골자료에서 장두형의 두개골이 확인되어 한국 청동기시대 주민 구성의 다양성에 대해서 연구해볼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고 하겠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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