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과 고조선 한]_7장
제7장 한(韓)
1. 한(韓)의 역사적 위치
1) 한(韓)의 명칭
우리 민족사에서 대한(大韓)이라는 명칭을 전면에 내세운 ‘대한국국제’는 1897년 10월~1910년 8월까지 일제침탈 막바지에 등장한 우리나라의 이름이다. 고종이 1896년 2월 아관파천 후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에 환궁한 후 구본신참의 제도로 조선의 부국강병과 근대 주권국가를 실현하기 위하여 1897년 새 국호를 대한(大韓)제국으로 정하고 황제에 등극하여 대내외에 선포하였던 이름인 것이다.
<고종실록>에
“우리나라는 곧 삼한의 땅인데, 국초에 천명을 받고 한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 나라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 하지 않고 ‘한’이라고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광무개혁 당시 국호를 한 글자로만 써오던 중국에서 힌트를 얻어 한 글자 국호로 제국을 선포하고자 했던 것이다. ‘韓’이란 한자의 뜻은 ‘우물난간’이란 의미로 쓰이는 것이고 우리민족과 관련된 ‘韓’은 본래 한자어가 아니고 발음만 韓을 빌어 한자로 적은 것으로 ‘韓’이란 한자의 뜻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 역사에서 삼한에 관한 언급으로 신라 말 최치원이 표현한1 삼한의 마한, 진한, 변한이 고구려, 신라, 백제 3국으로 계승 발전했다는 《삼국사기》기록이 오래 동안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삼한은 원래 뜻을 벗어나 ‘삼국’내지 ‘해동’을 뜻하는 용어로 바뀌었으며 나아가 신라 말과 고려시대에는 ‘일통삼한론’의 정치적 의미가 더해지면서 삼한을 삼국으로 보는 시각이 고착되었다.2 삼한, 삼국에 대한 시각의 변화는 조선 중기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에서 삼한의 위치를 북쪽의 고조선과 대비하여 한강 이남으로 보고 마한을 경기 · 충청 · 전라지역에, 진한을 경상도 동북지역으로, 변한을 경상도 서남지역으로 비정하였다.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강역고》에서 변진이 가야임을 밝히고 낙동강을 기준으로 진한과 변한의 위치를 분명하게 제시하여 오늘날 통설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19년 삼일운동 이후 중국 상해에서 발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나라의 명칭을 정하는 과정에서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 하자는 뜻에서 ‘대한’ 의 국호를 계승하고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정을 수립한다는 의미에서 민국으로 바꾸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해방이후 1948년 나라를 건국하면서 남한은 상해임시정부에서부터 사용해오던 ‘대한민국’을 헌법 제1조에서 국호로 정하여 사용하게 됨으로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어왔다.
한이라는 명칭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한민족을 비 롯 한식 · 한복 · 한옥 · 한과 · 한류 등으로 폭넓게 쓰여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이름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역사기록에 한반도 첫 주민으로 기록된 韓國人
‘한’은 대동강유역 평양에 고조선이 자리 잡은 후 준왕이 위만에게 축출되어 남천하기 전 한반도 중남부지역에서 초기국가로 등장했던 나라이다. 중국의 사서에는 한 무제의 고조선 침공 이후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한의 기원 및 실체와 관련하여 기록한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삼국지》 <위서동이전>이며 이후 《후한서》 <동이열전>, 《진서》 사이전>, 《삼국사기》 등에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왔다.
《삼국지》는 중국 진나라 촉한 출신 진수가 저작랑으로 있었던 진 태강 280년~289년경에 총 65권으로 편찬한 기록이다.
중국 한나라 이후 3세기 전반까지 한반도의 사정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하한 년대에 비해 상한의 시기가 모호하다고 하겠다. 이후 1세기 늦게 송나라 범엽에 의해 찬술된 《후한서》 <동이열전> 등은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기록을 참고 후한시대 동이의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는
“위만에게 쫓겨났던 준왕이 근신과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를 통해 韓지역에 가서 스스로 한 왕이 되었다. 그 후 망하여 지금은 한인들이 제사를 지낼 뿐이다.”3라는 기록에 따르면 준왕의 망명 시기인 기원전 194년 전부터 한반도 남쪽에 韓이라는 정치사회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기원전 194년 이전부터 준왕이 남천한 곳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한이라고 인식하였고 준왕이 한지에 도착한 후 스스로 한 왕의 역할을 하였지만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내용이다.
《삼국지》 <동이전> 진변한 조에
“진한의 노인들은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유망인 들이 (중국)진나라의 과도한 역을 피하여 韓國으로 왔는데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떼 주어 살게 되었다.”4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진나라는 중국 진왕 정이 전국시대 끝 무렵에 6국을 정복한 후 기원전 221년에 세운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이다. 진시황은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토목사업과 만리장성 축성 등 과도한 역을 백성들에게 부과하게 되고, 백성들 중 일부는 무거운 역을 피하여 머나먼 한국에까지 피난해왔는데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주어 진한이 성립되어졌다는 내용이다. 이 때 중국 진나라 사람들이 동남쪽 한국에 도달한 시기는 진나라의 부세와 부역 등 폭정을 피해 망명해왔기 때문에 韓國은 기원전 3세기경 이전부터 존재했던 나라라고 볼 수 있겠다.
《삼국지》 <동이전> 왜전에는 낙랑군에서 왜에 이르는 항로를 말하면서 한국을 거친다고 하여 삼한을 표기하지 않고 한국이라고 호칭했다. 앞에서 살펴본 《삼국지》의 기록들은 한의 명칭이 삼한이 아니라 한 또는 한국이라는 명칭으로 사용해 왔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