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과 고조선 한]_6장
2) 위만조선에 관한 기록
위만조선이 등장하는 당시의 중국대륙의 정세는 혼란기의 전국시대를 제패한 진시황 정이 전국 순회 중 급사하자 대륙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고조선의 서쪽경계인 요동지방에는 전국시대 말 중국통일전쟁 시기부터 연 · 제의 지역민들이 수시로 흘러 들어왔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의 사후에 일어난 진승의란으로 중국대륙에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러자 조 · 제 · 연의 유민들이 피난해옴으로 고조선의 서부지역은 인구가 상당히 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되어 진 것으로 보여 진다.
불사장생의 약을 구하며 영원한 제국을 꿈꾸던 진시황의 거대한 제국이 무너진 후 혼란기에 등장한 초 항우와 한의 유방이 천하 쟁패를 벌였고, 결국 유방이 승리하여 한나라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유방은 근친과 개국공신들에게 한의제후와 왕으로 봉하고 나라를 다스렸으나, 몇 년이 지난 후 성씨가 다른 제후 왕에 대한 척결을 단행하였다. 초왕 이었던 한신이 후로 강등되었다가 주살되었고, 연왕 노관은 제후 왕들이 차례로 제거되어가자 기원전 195년 흉노로 도망가게 되었다. 이때 위만도 1천여 무리를 이끌고 조선으로 망명한 후 조 · 제 · 연나라 유민세력을 규합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사기》 권115. <열전>55, 조선조에
“연왕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의 옛 공지인 상하장에 거하였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 및 옛 연·제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에 도읍하였다.” 라고 기록하여 진한교체기 중국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한고조 유방과 같은 동향인 연왕 노관은 토사구팽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하였다. 이에 아마도 위기 위식을 느낀 위만도 동쪽으로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도망하여 패수를 건너 진의 옛 공지인 상하장에 거하였다. 위만은 진번과 조선의 만이 및 중국의 망명자를 규합하여 왕검에 도읍하였다는 내용으로 기록되고 있다. 사마천이 그냥 조선이라고 해도 될 내용을 ‘조선의 만이’라고 강조한 것은 당시 조선에 대한 상당한 위협감을 느끼고 있는 한 식자층의 인식수준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30, 한 인용《위략》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한 뒤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항복하였다. 서쪽변방에 살게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들을 거두워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준을 설득하였다. 준은 위만을 믿고 사랑하여 박사로 삼았고 규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을 봉해주어 서쪽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에게 보내 속여서 말하기를 ‘한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은 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삼국지》에서 인용한 《위략》에는 위만이 조선왕 준에게 의탁한 후 서쪽변계에 거주하도록 해주면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준을 설득하였다. 준왕이 그를 신임하여 박사에 임명한 후 백리의 땅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 후 위만이 중국에서 온 망명자들을 규합하여 세력이 커지자 한나라군대가 쳐들어오니 왕을 숙위하기를 청한다는 거짓 보고를 하고 준을 공격하여 축출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조선 왕 준을 축출한 위만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영리하게 활용하여 주변지역에 세력을 확장해가게 된다.
《사기》 권115, <열전> 55, 조선조에
“효혜고후의 시대를 맞아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된 무렵이었다. 요동태수는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만이의 군장이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할 것을 조건으로 위만을 외신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였다. 천자도 이를 듣고 허락하였다. 이로써 위만은 우수한 무기와 재물을 얻어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자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게 되니 사방 수 천리의 나라가 되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위만은 주변 정치세력과의 갈등 소지를 해소하고 안정된 국가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요동태수를 통해 한나라의 외신으로 편입해간 것으로 보인다. 위만은 변경 밖의 오랑캐들을 통제 하면서 한나라의 우수한 무기와 재물을 얻어 상당한 힘을 키운 다음, 주변의 작은 읍들을 흡수하고 급기야는 진번과 임둔을 복속시켜 새로운 위협 세력으로 등장해 것으로 볼 수 있다.
위만의 출자는 어디로 보아야하나.
조선의 왕으로 새롭게 등장한 위만은 어느 족속 출신인가는 상당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던 《사기》의 내용에 의하면
“연왕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 라는 기록과
《삼국지》에서 인용한 《위략》에는
“연나라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항복하였다.… 준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로 임명하고 규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을 봉해주어 서쪽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라는 기록에 대한 해석으로 위만이 어느 나라계통인지 다양한 견해가 있다.
중국사서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여 한나라계 연인으로 보는 일본 관변학자들의 견해가 있다.9 위만이 관리로 있던 당시 연나라 종족구성이 다양했고 그가 망명할 때 조선인의 풍속인 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었으며 중국식 국호를 쓰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위만은 조선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10 세 번째로 위만의 원래 이름은 만으로 그를 연의 조선고지 점령에 의해 연인이 된 토착세력의 후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1 여러 견해 중 위만이 연의 조선고지 점령에 의한 연인이 된 토착민의 후예이거나, 상투를 틀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썼기 때문에 위만이 조선인이라는 견해가 남북한 학계의 다수설로 자리 잡았다. 위만의 출자에 대하여 위만이 연왕 노관을 따라 흉노로 가지 않고 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복장을 한 후 조선에 망명하였다는 기록자체에 많은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결국 위만이 조선의 풍습과 국호를 따르고 조선 땅에서 펼쳐진 역사이기에 위만조선은 한국사의 영역이라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위만이 왕위를 찬탈했지만 위만세력은 옛 조선의 질서에 편입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위만이 가장 중요한 국호를 조선이라고 그대로 사용했고 옛 조선의 지배층을 중용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보이는 위만조선의 고위직 인물로 등장하는 조선상 노인이나 니계상 삼 등은 일정한 지역에 기반을 둔 부족을 대표하는 대표자들로 볼 수 있다.
위만은 고조선과 주변 정치세력과의 갈등의 소지를 해소하고 안정된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요동태수를 통해 한나라와 ‘외신’관계를 맺게 된다. ‘외신’이라는 형식적 예속방식을 통해 한나라에 대해서는 주변세력의 침략을 방어해주고 반대급부로 한나라의 우세한 병기와 재물을 얻어 주변세력을 장악하는 여건을 만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위만왕조는 소수의 중국계 유이민 집단과 다수의 토착 고조선 세력을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한 중국의 문물을 수용하여 군사력을 증강시켜 인근의 진번 · 임둔 등을 복속시켜 나갔다. 한편으로는 한나라와 직접교역 하던 한반도 남부지역의 여러 나라들을 통제하여 중계무역의 이득을 취하고,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고대국가의 기틀을 세워 왕권의 안정을 추구해갔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