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록

[한민족과 고조선 한]_6장

늘별~* 2023. 6. 15.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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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헌사료에 기록된 고조선

1) 중국문헌에 최초로 등장한 고조선

 

중국 측 문헌사료 중에 조선을 최초로 기록한 것은 관자라는 사료이다. 관자는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 관중이 편찬했다고 전해지지만 기원전 4세기경 전국시대 사람들이 기술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8

관자는 춘추시대 제나라를 본위로 하여 제환공과 관중의 대화를 기록한 내용으로 조선의 존재가 처음으로 언급된 기록으로는 관자23 <경중갑>편과 <규도>편을 들 수 있다. <규도>편에 환공이 관자에게 내가 듣건데 해내에 귀중한 예물 일곱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에 대 해 들을 수 있겠소라고 하니 관자가 음산의 유민이 그 한가지요 연의 자산 백금이 그 한가지요 발과 조선의 문피가 그 한가지요···’라고 답하였다.”

<경중갑>편에 환공이 말하기를 발과 조선이 조근을 오지 않는 것은 문피와 태복을 예물로 요청하기 때문이다··· 한 장의 표범가죽이라도 여유 있는 값으로 계산해준다면 8천리 떨어진 발과 조선도 조근을 오게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사료에 따르면 조선의 존재가 이미 중국 춘추시대인 기원전 8~7세기경에 호랑이가죽 문피가 귀중한 예물 중에 하나이며 조선의 위치는 멀다는 뜻의 8천리로 언급되어 있어 당시의 고대중국인들이 조선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원전 4~3세기경 저술되었으나 뒤에 곽박(276~324)에 의해 다시 편찬된 산해경해내북경에는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는데 해의 북쪽이며 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라고 하여 조선이 연나라 열양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전국책29 연책에 소진이연 문후에게 말하기를 연의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다.”라 하여 기원전 4세기경에 연나라 동쪽에 조선이 있었음이 언급되어 조선과 연이 지리적으로 연접되어있음을 당시 북중국 사람들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소진과 연문후가 언급되는 이 시기는 본격적으로 중국의 전국시대가 벌어지고 있었다. 춘추시대에는 분권적 봉건질서 속에 읍을 단위로 유지되던 중층적 지배가 전국시대에는 군현제에 의한 직접지배로 바뀌였다. 제후국 간의 공격과 분쟁은 격심해졌고 대규모전쟁이 장기화되어 대다수 약소국이 강대국의 군현체제로 편입되면서 전국시대 7웅의 나라가 등장하게 되었다. 7웅으로 성장해간 나라들의 제후들은 종전의 후나 군의 칭호를 버리고 왕호를 사용하게 되는데 제후국 가운데 위 혜왕(기원전354)이 왕을 처음으로 자칭한 이후 제 위왕, 건왕 등이 칭 왕하고 기원전 323년에는 연의 역왕이 칭 왕을 하게 되었다. 당시 칭 왕을 하기 위해서는 각국의 승인이 필요했고 일방적인 칭 왕은 타국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빌미가 되는데 연나라의 칭 왕에 대해 조선후가 연나라를 공격하고자 했다는 기록이 등장하기도 한다.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연의 역왕의 칭 왕에 대해 고조선왕도 칭 왕을 하면서 연과 전쟁을 시도하는 단계에까지 이른다. 중국 선진시기의 역사기록에 간혹 등장하던 고조선이 전국시대 칠웅 중의 하나였던 막강한 연나라에 대항하려고 하는 고조선의 상황은 기원전 4~3세기 상황이 언급되어 있는 위략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삼국지30, 위서30, 동이전30, 한 인용 위략

옛날 기자의 후예인 조선 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혀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 함을 보고, 그도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공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고 하였는데 그의 대부예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 뒤 자손이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은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지방을 침공하고 2천 여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위 기록의 고조선의 칭 왕 시기는 연의 역왕(기원전332~321)이 처음으로 왕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대체로 기원전 4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는 시기이다.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 후라는 기록은 주나라의 종법질서를 역사기록의 근간으로 삼는 춘추필법의 관점에서 기록자가 고조선의 출자를 해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선후가 칭 왕을 했다는 것은 기원전 4세기 후반에 고조선에도 왕격을 유지하고 쓸 수 있는 실력자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 왕이 군사를 일으켜 역공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고 전쟁을 하려고 했다는 것은 연을 공격할만한 군사와 장비를 비롯한 막대한 군수물자를 확보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러자 고조선왕의 대부 예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라고 하여 왕 밑에 대부라는 관직명이 언급되고 있다. 대부라는 관직은 춘추시대 주 봉건제에서 경과 더불어 족벌의 장에게 주어진 칭호로 국군--대부-사로 이어지는 수직적 지배질서 속에 중간 관리자의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위략의 조선후와 연왕의 갈등관계는 연이 요동방면으로 진출하려는 팽창정책에 고조선이 맞서는 상황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지는 기록에 그 뒤에 자손이 교만해지고 포악해지자라는 기록은 고조선의 왕도 전국7웅의 여러 나라처럼 왕위를 부자상속하고 있음을 인식한 기록으로 볼 수 있다. 고조선과 긴장관계에 위협을 느낀 연왕은 결국 장군 진개를 파견 고조선의 서쪽지방을 침공하여 2천 여리를 빼앗아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라는 내용은 고조선의 영토가 서쪽지방의 2천 여리를 뺏길 정도의 광대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음을 역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후반에 고조선은 부자가 상속하는 왕권제도가 존재하고 연을 공격하려는 막강한 군사력과 서쪽지방의 2천 여리를 빼앗길 정도의 광대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고조선은 소국이 아니라 전국시대 7웅 중의 하나인 연과 대등한 수준으로 성장하여 중국 역사 기록에 등장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지기록은 연나라에 이어 중국을 제패한 진나라와의 관련된 고조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삼국지30, <동이전>30, 한 인용위략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 몽념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조선왕 부가 왕이 되었는데 진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하여 진나라에 복속을 하였지만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이 즉위하였다.”

그 후 20여년이 지나 중국에서 진승과 항우 등이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 · 조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점차 준에게 망명하므로 준은 이들을 서부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위의 사료에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몽념을 시켜 연 관할인 요동에까지 장성을 쌓는 등 공세를 취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조선왕 부가 형식적으로는 복속했지만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 후 진시황의 폭정에 진승과 항우가 기병하여 천하가 혼란해지자 연 · · 조의 백성들이 고조선 준에게 망명해오므로 이들을 서부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앞의 내용을 정리하면 고조선은 중국 춘추시대인 기원전 7세기 이전부터 존재하였고 그 세력이 연과 각축을 벌일 정도로 성장하여 왕호를 사용하는 국가적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중국 측 사서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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